[한국에서 생산된 외국의 자동차]기아 엘란 편

기사입력 2017.08.0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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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에서 선발주자의 제품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경험은 제품의 생산 및 개발에 대한 노하우를 획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선발주자가 적게는 십 수년, 많게는 수십년에 걸쳐서  얻은 성과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는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남기고 간 군용 차량의 부속들을 주워 모아 만든 국제차량제작의 `시-발`을 시작으로 했다. 그 이후에는 자동차 산업의 선발주자인 서유럽이나 북미 등지의 자동차 기업들에서 이미 만들어진 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면서 발전을 이루며,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다. 모토야에서는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의 성장을 이끌었던, `한국에서 생산된 외국의 자동차`들을 다룬다. 이번 기사의 주인공은,  영국 태생으로, 한국으로 넘어와 기아자동차(이하  기아차)의 첫 스포츠카가 된 ‘엘란(ELAN)’에 대하여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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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란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본래는 영국의 로터스(Lotus)사에서 개발된 경량 2인승 스포츠카다. 영국의 로터스는 극단적인 경량화 설계가 돋보이는 퓨어 스포츠카를 만들어 온 자동차 제작사이자, 영국의 유서 깊은 모터스포츠 종가이기도 하다. 또한, 자회사인 로터스 엔지니어링을 통해, 다른 자동차 제조사의 설계 위탁  및 자문 등의 활동도 병행하였으며, 이 역시 로터스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이러한 활동 중 하나는 기아차의 첫 독자개발 중형세단 크레도스의 승차감과 핸들링 등, 하체 설계를 위탁 받은 것을 들 수 있다.


기아 엘란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로터스 엘란은 1989년 처음 유럽에서  출시된 2세대 엘란이다. 초대 엘란은 전방엔진 후륜구동(FR) 레이아웃의 소형/경량 2인승  오픈 톱 스포츠카로, 오늘날 2시터 로드스터의 개념을 확립한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하지만 2세대엘란은 종래에 로터스가  취하고 있었던 방법론과는 여러모로 다른 접근법으로 만들어진, 실험적인 성격이 강한 차였다. 이는 엘란의 개발이 로터스가 GM에 인수된 1986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과 당시 로터스의 주요한 사업 수단이었던 다른 자동차 제조사의 설계 위탁 사업을  의식한 데 따른 것이다.


GM은 로터스의 새로운 엘란을 개발하는 데 4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GM  산하 계열사들의 부품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신차를 개발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로터스 역시, 크레도스의 사례와 같이, 다른 자동차 제조사의 설계 위탁 사업에  있어서 자사의 기술 역량을 보여줄 기준이 될 만한 전륜구동 양산차의 존재가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발된 로터스 엘란은 GM 산하에 있었던 이스즈(Isuzu, いすゞ)의 파워트레인(엔진 및 변속기)과 다른 GM 계열사의  부품들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로터스 스포츠카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최후의 전륜구동계를 채용했다. 섀시는 경량 스포츠카 제작사 로터스의  노하우로 완성한 전용의 백본 프레임을 뼈대로, 그 위에 FRP 소재의  차체(바디) 패널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로터스 엘란은 이스즈로부터 공급받은 1.6리터 자연흡배기 및 터보  가솔린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실었다. 이스즈의 1.6리터 가솔린 엔진은 132마력의 최고출력을, 1.6 터보 엔진은 164마력의 출력을 냈다. 자연흡배기 엔진을 탑재한 엘란의 공차중량은 997kg으로, 1톤도 채 되지 않았으나, 터보 엔진을 탑재한 버전은 1,110kg에 달하는, 로터스 입장에서는 무거운 몸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엘란은 당시의 유럽 소비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2세대  엘란은 초대 엘란과는 모든 면에서 지향하는 바가 너무나도 다른 차였다. 소배기량 엔진의 동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전륜구동의 견인력과 안정적인 제어력을 갖췄지만, 이러한 자동차를 선택할 소비자 중에서는 전륜구동을  원하는 소비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유럽의 소비자들은 초대 엘란이 세워 놓은 경량 로드스터의  기준에 놀랍도록 부합하면서도 가격마저 착했던 완벽한 대체품, 마쯔다 MX-5(유노스  로드스터)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리고 마쯔다 MX-5의 뒤이어 잇달아 출시되었던 다른 경량 2시터 로드스터들에게  밀려, 엘란은 상업적으로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막대한 개발비를 들인 엘란이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자, GM은 1993년 부가티(Bugatti)에 로터스를 매각했다. 로터스는 부가티에 넘어간 이후로도 엘란을 ‘엘란 S2’라는 이름으로 800대 한정으로 생산하는 등, 생산을 계속했으나, 부가티는 로터스의 전륜구동 소형 로드스터가 자사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로터스 또한 재정적자가 지속되고 있었기에, 로터스는 엘란 브랜드와 생산라인의 매각을 시도했다. 그리고 곤란한  처지에 있었던 로터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이 바로 기아자동차였다. 1995년, 기아자동차는 로터스로부터 엔진과 변속기를 제외(이 두 가지는 이스즈의  것이었으므로)한 엘란 브랜드와 차체, 생산에 대한 권리를  사들이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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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을 건너 기아자동차의 품으로 넘어온 엘란은 1996년부터 기아차의  산하에 있었던 기아모텍(구 서해공업)에서 생산을 개시했다. 또한, 기아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부품을 자체조달해야  했는데, 이는 엘란이 GM 계열사를 비롯한 다른 제조사의  부품을 상당 수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아 역시, 엘란을 인수하면서 상당한 수의 부품을 국산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파워트레인이 문제였다. 오리지널 엘란의 파워트레인은 본래  이스즈의 것이었으므로, 기아는 엘란에 다른 회사의 파워트레인을 수입해서 탑재하거나, 자체 개발 파워트레인을 탑재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기아차는 엘란의 심장으로 채용된 엔진이 기아차의 자체 개발의 T8D 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T8D 엔진은 본래 크레도스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엔진으로, 당시  기아차가 동원할 수 있었던 모든 모험적인 기술을 투입한 엔진이었다.


T8D 엔진은 당대에 보기 드문 협각 밸브의 채용과 함께, 피스톤에는 그래파이트 코팅을 적용하는가 하면, 피스톤을 냉각하기  위한 오일제트 기구까지 적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부동식(Full-Floating Type) 피스톤 핀 고정 방식도 채용했다. 이  구조는 피스톤 핀이 피스톤과 커넥팅 로드 사이 어느 곳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 자유롭게 움직이는 형태로, 고속으로  회전하는 중~저배기량 엔진에 유리한 구조다. 1.8리터의  배기량으로 130마력/6,000rpm의 최고출력과 17.0kg.m/4,500rpm의 최대토크라는, 배기량에 비해 높은  성능을 냈다. 크레도스에 처음 도입된 기아 T8D 엔진은  그 기술력을 인정받아, 장영실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하지만 기아차는 이 정도로는 스포츠카의 심장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이보다  더욱 고성능을 내기 위한 개조에 착수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실린더 헤드의 개조였다. 헤드를 개조하면서 캠 역시 하이 듀레이션 캠(통칭 하이캠)을 사용했다. 하이캠은 밸브를 더 많이, 더 빠르게 여닫을 수 있게 하여, 자연 흡/배기 가솔린 엔진의 성능 강화에 쓰이는 캠이다. 이를 통해 최고출력은  기존 130마력에서 151마력으로, 최대토크는 기존 17.0kg.m에서 19.0kg.m까지 높였다. 엘란의 T8D  엔진은 크레도스의 T8D와는 형식명도 다르며, ‘Hi-Sprint’라는  별칭까지 붙어 있었다. 엘란의 엔진은 고회전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그 동력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엔진이었다. 스포티한 주행을 즐기는 스포츠카에 어울리는, 개성  있는 엔진이었다. 변속기는 세피아의 5단 수동변속기만을 사용했다.


기아차의 품에 있었던 엘란은 새로운 파워트레인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이 원형과는 상당부분 바뀌었다. 보닛과 테일램프, 브레이크 시스템,  계기반, 비상등 스위치를 비롯한 인테리어의 자잘한 내부 부속품들, 심지어는 스티어링 휠과 에어백까지 국산화가 진행되었다. 보닛은 T8D Hi-Sprint 엔진의 용적 문제로 인하여 바뀌게 된 것으로, 오리지널  엘란의 그것에 비해 더 돌출되어 있다. 또한, 새로운 엔진  때문에 차체 하부의 서브프레임 일부까지 변경해야 했다. 테일램프는 오리지널 엘란의 투박한 사각형 테일램프에서  기아차가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원형 테일램프로 바뀌었다. 브레이크 시스템은 초기 아벨라 기반의 시스템을  사용하다가 밸런스 문제로 인해 크레도스 기반의 시스템으로 변경했다. 서스펜션 역시, 당시 국내의 도로 사정을 감안하여 지상고를 좀 더 높였다. 이 외에도  계기반 등 각종 부속품들 역시 되도록 기아차의 부품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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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얻은 엘란은 1996년, 당시 자동차 보급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던 대한민국 시장에  나타났다. 엘란은 기본적으로 로터스의 수제작 스포츠카로, 공정을  자동화할 수가 없었기에, 당시 조립을 맡았던 기아모텍에서 전량 수작업으로 제작되었다. 엘란의 제작 원가는 대당 4천만원에 육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기아차는 엘란의 대당 가격을 2,750만원으로 결정하고 판매를 개시했다. 원가에 맞춘다고 하면, 당대 국산차 중 가장 비쌌던 대우 아카디아를  넘어 설 지경이었기에, 국내에서는 현실성이 없었다. 이에  따라 기아는 엘란이 한 대 판매될 때마다 1,500만원 가량의 손해를 안아야 했다. 1996년 7월 출시된 엘란은 1999년  단종될 때까지 총 1,055대가 생산되었으며, 이 중 200여대는 이웃나라 일본에 ‘비가토(Vigato)’라는  이름으로 수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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